나는 젊음이란 꿈을 꾸는 동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늙지 않기 위해 꿈을 꾼다. 이루지 못할 꿈이 되기도 하고, 이루지 않는 꿈이 되기도 하지만. 꿈이라는 것은 한번 시작하면 계속 남아 있다. 이루기 전까지는 이루지 못한 꿈에 계속 미련이 남는다.

나에게 여행이란 것이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여러 책을 통해 여행을 꿈꾸기 시작했지만, 항상 책 뒤에서 세상을 보며, 단 한번도 제대로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나에게 2010년 전역을 앞둔 나에게 아버지는 여행을 권했다. 더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여행을 권함으로써 나는 지금까지 도망치던 나의 뒷모습을 봐야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역하면 뭐할래? 여행 한번 해봐야지?'라고 말씀 하실때. 아버지가 나를 여행시켜준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행은 돈으로 가는게 아니고 마음으로 가는 것이고, 가방을 싸면 가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때 그 순간은 살짝 아니. 많이 실망했다...

하지만 그런 말씀 덕분에 좀 더 자신있게 배낭을 싸고 첫발을 뗄 수 있었다.

2010년 한해를 일만하고 지낸 것 같다. 그 땐 친구도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사회적인 관계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아니 그 순간 나는 사회적인 관계. 그 따뜻함과 귀찮음을 느끼지 못했다. 술을 먹지 않는 나는 친구들과 만나도 어울리기 쉽지 않았다. 

워킹홀리데이라는 프로그램은 보통 많은 사람들이 호주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호주는 보통 지원만 하면 가는 것에 비해 캐나다나 다른 나라들은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캐나다를 생각하게 된 이유는 아메리카 대륙이기 때문에 미국이나 그 밑에 남미까지도 여행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있는 호주보다는 어려운 캐나다에 일단 지원을 해보고 떨어지면 호주라도 가보려는 마음이 있었다.

하반기 공지가 캐나다 대사관에 올라온 후 준비하라는 여러가지 서류들을 준비하고는 필승의 다짐으로 어떻게 합격할 수 있는지 알아본 결과. 서류만 미비하지 않다면 거의 선착순. 혹은 9시 정각에 우체국에 접수하는 것이 승패를 가르는 기준이라는 것을 알고는 준비된 서류를 준비해서, 새벽 6시부터 우체국 앞에서 기다렸다...

좀 긴장했다거나 설레발을 친 경우가 되어버린 것은 9시 몇분 전에 온 다른 지원자도 똑같이 9시에 접수를 하면서 난 좀 특이한 사람이 되버린 것 같았다.

이제 나의 손을 떠난 서류는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난 그냥 천천히 기다리기로했고, 2월 정도에 집에 등기가 왔었다는 작은 쪽지가 문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캐나다 대사관이라고 쓰여진 발신인을 보고는 드디어 가는 구나 생각하며, 다음날 서류를 받아 들고 사진도 찍고 카페에 인증샷도 올리고 그랬었다..

어렵지 않게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에 합격 한 후 나는 비행기표만 사고, 그저 기다렸다. 그 때에 알게 된 것은 사람들이 안해 본 것에 대해서도 많이 들은 것으로 조언을 한다는 것이였다.

나는 한국에서 숙소도 구하지 않고, 일단 가서 뭐든 하겠다는 막무가내로 기다림을 선택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숙소를 구해야 한다느니, 초기에 필요한 것을 사가야 한다느니. 하면서 겁을 주었고, 숙소 문제에 관해서는 보지 않으면 절대 선택하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초기에 필요한 것은 조금씩 준비를 했다. 하지만 가기 전에 꾸려본 가방은 내 상상을 뛰어 넘어 엄청나게 커지고 많아 지고, 무거워졌다. 

원래는 커다란 배낭 여행용 백팩 하나만을 가지고 갈 생각이었으나 다 챙긴 짐은 커다란 캐리어 하나. 기존에 커다란 백팩. 일반 백팩. 크로스백. 책을 넣을 쇼핑백. 이렇게 5개나 되었다. 나중에 보니 정말 어디 이민가는 것 같았다.

처음가는 여행인데다 해외 멀리 가는 여행이다 보니 이런 저런 에피소드도 많다.

집에서 출발을 하면서 다 챙긴 가방을 아버지의 차에 싣고 다 챙긴 것을 확인하고 공항행 리무진을 타러 갔을 때. 내가 캐리어를 잠그고 캐리어 키를 안 챙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이 어디에 두고 왔는지 기억이 나서.(침대위에 뒀었다...) 아버지께서 다음 리무진에 보내주셨는데. 작은 키 하나도 돈을 내며 보내 주신 것을 알고는 '내가 조금만 정신 안 차리면 안되겠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그 다음 또.

공항에 처음 가다보니 잘 몰랐던 탓에 보딩타임에 공항에서 출입국 검사를 하면 되는 줄 알고 천천히 공항 구경도 하고 작별인사도 하다가. 나중에 보니 국제선 출국장은 저 멀리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허겁지겁(항상 공항에서 허겁지겁 할 때면 '나홀로 집에'가 생각난다.) 터미널까지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이차저차 비행기에 올랐을 때. '아 이제 가는구나'라고는 생각 했지만, 사실 잘 느낄 수 없었다. 최저가의 항공을 선택했기에 베이징에서 경유를 할 때에도 너무 늦은 시간에 베이징 공항에 경유를 하다보니 삭막하면서 밝기만한 베이징 공항에서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하는 여행이라 얼마나 긴장을 많이 했는지 안쓰러울 정도인데, 여권과 돈등 중요물건을 목에 걸고 옷 제일 깊숙히 넣어두고 다니고, 백팩에 있던 노트북은 계속 꺼내서 검색을 받아야되서 나중에는 책과 함께 쇼핑백에 넣어가지고 다니게 되었으며, 그 결과 공항을 돌아 다니면서도 백팩에 크로스백에 쇼핑백 이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여행에 좋은 징표는 이미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베이징 공항에서 경유하는 동안 wi-fi 아이디를 받으려 할 때 중국계 캐나다인을 만났다. 그 사람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긴장을 좀 풀 수 있었다.

(그 때 그 여자가 쓰던 컴퓨터도 애플의 컴퓨터 였다. 그 뒤로도 난 많은 애플 제품들을 보게 되었는데, 느낌 상 사람들이 과시를 위해 애플 제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혹은 편리에 의해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애플 핸드폰은 그래도 조금씩들 쓰지만. 애플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우리 나라에서는 또한 일부사람들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쓰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지 않고 애플제품이 편리해서 쓰는 사람들 조차 그런 부류로 묶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렇게 처음 접한 애플부터 후에 목사님의 가족들이 쓰는 애플 PC들을 보면서 나 또한 맥 os도 사용하고, 무엇이 사람들을 애플에 빠지게 만드는지 알고 싶어서 이 후에 애플제품들을 구입하고 있다.)

중국항공을 이용하면서 불편했던 점 한가지는 중국 승무원이 한국인인 나를 자꾸 중국인으로 착각하고 중국말로 첫 인사를 건넨다는 것이였다. 기내식을 줄 때에도 나에게 중국말로 물어보면 난 매번 영어로 해달라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그 외에 어떤 것도 불편하지 않았고, 장시간 비행을 즐길 수 있었다.

알래스카 쪽으로 건너갈 때는 창밖을 보면서 신기한 광경을 창 밖으로 볼 수 있었다.

내가 정말 외국에 왔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은 비행기가 착륙하면서 바퀴가 땅과 닿아 느껴지는 그 충격과 함께 였다. 비행기가 땅에 닿는 순간 작은 진동과 함께 난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단순히 나의 꿈을 이룬 행복감에 젖은 것이 아니라 가족, 우리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이였고, 그제서야 엿볼 수 있었던 아버지의 마음에 관한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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